하노버 본향교회 주일 예배 설교
2019년 4월 7일 / 설교자: 손창근
사순절에 배우는 예수님의 삶 시리즈(4):
자유롭게 살기
마태복음 26:36-46
여러분은 자유롭습니까? 아니면 자유롭지 못합니까?
질문이 정확하지 못하지요? 어디로부터 자유로운지 묻지 않았으니까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데 자유롭느냐고 물으면, 자유롭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나라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여행에 대한 자유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거의 모든 곳에 제한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아이슬란드나 나미비아나, 인도나 브라질이나 갈 수 있는 자유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 갈 만큼의 돈의 자유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쓸 수 있는 돈은 대개 은행계좌에 들어있는 금액만큼, 아니면 신용카드의 한도만큼의 자유가 있을 거고요. 그 이상의 자유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분에 자유를 누리고 있고, 어떤 부분에 자유스럽지 못함을 느낍니까?
여러분은 염려로부터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신앙 생활하는데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은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죄로부터 얼마나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에 붙잡혀서 불안하고 불편하게 끌려 다니고 있습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평화롭고, 억압받지 않고, 강요나 제약을 받지 않고,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만족스럽고, 긍정하고, 기쁘고, 옳기 때문에 인간에게 정말 좋은 상태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 8:32). 사람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면 자유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요.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믿기는커녕 냉담하게 보고 비판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은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절 앞에서부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1-32).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하겠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믿고 따라 살겠다고 하면, 그들은 진리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니까요. 또한 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도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은 우선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는 자유가 아닙니다. 율법을 무시해도 되는 자유가 아닙니다. 율법으로부터 면제받아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율법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율법의 규정만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훌륭한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닮아 살게 되면, 율법 준수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율법을 능가하는 생활, 곧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간, 영적이며 창의적이고 진정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던 날 밤, 그러니까 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결국 마지막이 될) 식사하고 난 후 예루살렘 성내에서 숙박하지 않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보면 북동쪽 성 밖에 야트막한 산/언덕이 있는데, 예로부터 올리브 나무가 많아서 올리브 동산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동산 아래쪽에 겟세마네라고 부르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갓 쉐마님“은 기름 짜는 곳(Ölpresse)라는 뜻인데요. 저희가 2017년에 올리브 동산으로 갔을 때, 올리브가 길에 떨어져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데, 그 비탈진 돌길이 기름으로 얼마나 미끄러운지, 운동화를 신은 아내는 아예 신발을 벗고 걸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기름 짜는 곳, 올리브 나무가 무성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마태 26:36b). 기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제자,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저기“로 갑니다. 기도하시려고요.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 상태가 어땠는지 마태복음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습니다. 고민하고 근심에 쌓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왜요? 무엇 때문에요? 십자가의 죽음을 이미 알고 계신 주님께서, 그 잔인하고 끔찍한 처형으로 죽어야 했기 때문에요? 예, 맞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 인간 예수의 진면목이 나옵니다. 바로 이 순간, 그도 우리와 똑 같은 참 인간이심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초기에, 5세기에 이르도록 벌어진 가장 큰 논쟁 중에 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소위 기독론이죠. 그는 신인가? 인간인가? 아니면 반 신, 반 인간인가? 격렬한 논쟁 끝에 내린 결론은, „예수는 참 신이면서 참 인간이시다“였습니다.예수님은 50% 신, 50% 인간이 아니라, (원래 100%가 되어야 맞는데) 예수님은 200%이라고 결론 내린 셈입니다. 완전한 신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인간이라고요.
예수님께서 왜 고민하며 슬퍼하셨다고요? 3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지금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러워하신다고요? 죽음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 내용이 그 다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기도는 길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잠들 정도였으니까요. „한 시간도 같이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나중에 말씀하셨는데요. 기도는 길었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만을 적고 있습니다. 단 두 문장으로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의 내용은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잔을, 이 죽음의 잔을, 이 끔찍한 십자가의 처형을, 그럴 수 있다면 그냥 피하게 해 주세요. 지나가게 해 주세요. 다른 길이 있다면!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근심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의 공포 앞에서.
스스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벅찼고, 닥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이 죽음을 자원해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다가오는 죽음은 예수님을 심하게 억압했고, 강압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자유롭지 못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자유롭지 못할 수 있는지 잘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도 목마르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졸리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존엄성이나 거룩함이 빛 바래지지 않지요. 오히려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친근함을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 매우 가까이 계실 수 있는 분이시고, 가까이 계시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유롭지 못한 예수님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자유를 목말라 하실 것입니다.
평소에, 매번 그는 얼마나 자유로웠습니까? 그의 행동, 그의 말, 그의 권위 가득 찬 능력을 보여주실 때에도 정말 자유로웠습니다. 그는 소유에도 자유, 명예에도 자유, 죄에는 당연히 자유, 사람들에게도 자유했습니다. 대제사장, 최고 공의회, 로마 총독, 바리새인들, 모두에게 자유로웠습니다. 세리들, 죄인들, 어린이들 앞에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자유가 없으니, 얼마나 그 자유를 갈구했겠습니까!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하신 일이 무엇이지요? 기도입니다.
왜요? 이 급박한 시간에 왜 기도를요? 왜냐하면, 자유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자유가 획득됩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미루는 만큼, 참 자유가 오는 것도 미뤄집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힘과 은혜를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아버지의 계획과 바람 대로 하십시오. 십자가? 당신이 져야 한다면 지겠습니다. 이 순종이 내 마음 깊은 데서 일어나서 자유롭게, 내 스스로 받아들이고 가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면 모든 것이 자유롭습니다. 죄에서 자유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뭔가 의무감에 시달리고, 무거운 책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남의 눈치를 자꾸 봐야 하고, 그렇다면 여러분, 딱 멈추고 생각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무엇을 이야기 해야 하지? 내가 하나님께 뭘 순종하지 않고 있지? 내가 뭘 주저하고 있지? 내가 뭘 외면하고 있지?
이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뭔가 하면,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이런 고민과 애로사항을 하나님 앞에서 풀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입니다.
자유에는 왜곡된 자유가 있습니다. ‚나는 괜찮아‘ 하는 자유, 자기 자신에게 눈감아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기가 참 민망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목회자를 생각하면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자도 사람이니까 한 번쯤 실수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당연히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겠죠.)
죄를 짓고 난 다음이 문제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얼마나 갈등이 되고,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죄짓고 설교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면,눈물로 회개하고,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적어도 양심이 살아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아픔과 자기 갈등과 회개가 없다면, 그저 변명과 은폐와 거짓말을 이어 한다면, 그것은 양심이 병들고 마비되어서 더 이상 작동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가장 난처해 하는 사람이 바로 양심이 마비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양심이 병들었으니, 기도마저 불량합니다. 자기 맘대로, 자기 식으로 기도하고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도 난처해 하시지만, 사람들도 무척 난처해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부디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 내 모습이 초라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 하더라도, 그것을 진지하게 느끼고, 하나님께 뭔가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그런 양심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유가 왜곡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중이 중심에 있으면 됩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을 통해 획득되는 자유는 그 누구도 터치할 필요도 없고, 터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호소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나답게 하고, 내가 가야 할 길을 확인하고, 또 그 길을 자세히 제시 받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염려, 고민, 문제, 의무감, 이런 데서 오는 압박, 강요, 부자연스러움, 기쁨이 아닌 피곤함. 어디서 이런 것이 오는지, 문제가 뭔지, 상황의 문제가 뭔지, 나 자신의 문제는 뭔지, 이 모든 것을 알아가고, 풀어가고, 해결 받는 길이 기도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잘 아시면 좋겠습니다. 왜 나는 지금까지 자유롭지 못했는가? 왜 교회 생활에, 신앙 생활에, 인간관계에, 돈 문제에, 죄 문제에 떳떳하고 자유롭지 못했는가?
기도를 안 했으니까요. 참 자유는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니까요.
절대로 저절로 안 됩니다. 기도를 해도 잘 안 되는데, 기도는 안 하고, 고민도 안하고 결과만 좋기를 바라면, 그것은 공짜를 바라는 것이고, 성경은 공짜를 바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있지요. 그런데 그 은혜의 통로가 무엇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와 말씀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그 밤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가장 힘든 문제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자유만큼 좋고 귀한 것은 없다고, 그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순종할 힘과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이 주님으로부터 잘 배워서 자유롭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얽어 매는 온갖 죄의 유혹과 습관에서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하는 이기적인 생각들, 하나님과 먼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게으름들, 온갖 옛 사람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억압과 부자유를 느낄 때마다 기도하면서, 우리도 주님처럼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주님 앞에 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