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3일. 본향교회 주일 설교.
천국은 경쟁해서 가지 않습니다
본문: 마가복음 9,33-37
한국에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엄청난 진통을 겪은 우리 민족은 이번 대선에 직면하여 매우 크고 예민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지도자가 한 시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모두가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출마자들은 일생에 한 두번 있을 이 일을 앞두고 밤낮 없이 선거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참모들과 추종자들 역시 이 정치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갖 힘을 발휘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여러 입장을 떠나, 선거는 경쟁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경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은 경쟁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찍부터 경쟁에 단련된 사람들입니다. 학교 공부가 경쟁이었습니다. 배움 자체도 중요했지만 손에 받아든 것은 시험 점수와 더불어 학급 석차, 학년 석차였습니다. 대학 입학 시험은 한국 사회가 일년에 한 번씩 몸살을 앓아야 하는 집단적 경쟁입니다. 이 경쟁에 치여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참으로 안타깝게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청소년들까지 있습니다.
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콩쿠르가 경쟁입니다. 공부를 마치고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젊은이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텐데, 이 역시 경쟁입니다. 모든 분야에 누군가가 무언가를 위해 결정되는데 있어서 경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 목사로 청빙되는 것도 경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직접 실력을 겨루어 경쟁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평가를 바탕으로 후보자들의 경쟁을 통해 결정이 됩니다.
경쟁은 우리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충분히 경험했듯이, 경쟁이 난무하는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사회가 더 성숙하고 안정적이 된다면 경쟁에 소모하는 에너지를 줄이고, 덜 경쟁적이면서도 모두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니다. 독일의 학교 성적 평가나 대학 입학제도를 보면 한국에 비해서 확실히 경쟁이 적습니다. 그렇다고 덜 배우거나 잘못 배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청소년들이 과도한 경쟁에 몰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배울 것을 배우고, 자신이 준비해 온 만큼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경쟁하는 세상”과는 확실히 다른, “하나님의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부분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들어갑니까? 천국에 입장 수 제한이 있어서 등수 안에 들어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서로 경쟁해서 더 나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으면 다 들어갈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안 맞으면 다 못 갈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 갈 사람은 상대 평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합당한 자들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천국은 사람들 사이에 경쟁을 통해 들어가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잘 하면 모두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천국을 바라보고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경쟁이 아니므로 모두가 잘 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서로 협력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경쟁해서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인데요. 예수님은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모습은 우리에게 모든 점에서 교훈이 되고 본받곻 따라야 할 지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남드로가 경쟁해서 이기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앞으로 살면서 자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그리고 집에 계셨다고 합니다. 이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너 서클끼리 있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이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을 않고 잠잠했습니다. 찔려서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 누가 더 큰 지를 논쟁했습니다. 사실 12명의 제자들이 서열도 없고 위 아래도 없으면 불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위계 질서가 한국처럼 중요한 것이 유대 사회였으니까요. 그런데 12명의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더 높고 큰 사람이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과연 그게 뭘까요? 그들이 내세울 만한 경쟁의 조건은 뭘까요? 삶의 경험이 많은 연장자? 아니면 최고령자는 아니어도 말 잘하고 지도력이 있어서 그룹을 대변할 만한 인물? 아무래도 신앙 그룹인만큼 영적 감수성이 탁월한 사람? 예수님의 카리스마를 닮아서 병자도 고칠 만한 능력을 가장 많이 지닌 사람? 아니면 예수님이 특별히 인정해 주셔서 가까이 두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최측근?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누가 크냐고 서로 토론했다면, “나는 보잘것없고 당신이 우리 중에서 가장 크다”고, “아니다, 당신이 더 높다”, 그렇게 다툰 것은 아닌 게 확실하죠. 뒤에 예수님의 말씀을 부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단락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정답은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고 앉으시고, 12 제자를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분위기도 중요합니다. 앞에서 집 안이라고 했습니다. 외부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순전히 12 제자에게 예수님은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을 향해서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 3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기려고, 높아지려고 경쟁하지 말라. 그저 끝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라.” 끝은 꼴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주셨습니다. 때마침 집안에 아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는 단순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약자를 대표합니다. 꼴찌를 대표합니다. 주님은 뒤에 10장에서 말씀하시죠. “천국은 이런 어린이 같은 자들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십니다(마가 10,14-15).
꼴찌가 되고 약자가 되는 것, 괜찮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꼴찌와 약자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높고 큰 자를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고 가장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아주 다른 길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바 경쟁을 이기고, 높은 순위에 도달하고, 커지고 널리 알려지는 것, 그 모든 영광의 길과 다릅니다. 작고, 낮고, 약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무지 세상에서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내 높아짐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이런 자들을 영접하고, 보살피고,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만큼, 아니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뉘앙스의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결론은, 예수님의 삶에서 남들과 경쟁해서 남을 누르고 싸워 이겨보자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이 어땠습니까? 경쟁이 없으니까, 뭐가 되든지 말든지, 뚜렷한 동기도 없고 목표도 없어 보입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때로는 분주하게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일에 얽매여 사신 것도 아닙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일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요. 가르치는 일과 치유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회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랍비들과 경쟁하지도 않고, 제자를 더 많이 확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쟁의식은 주변 사람들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일테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긴장 관계가 간혹 보이고, 어쩌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단 사이의 긴장관계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서로 경쟁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은 하시고자 한 일의 본질에 충실하셨습니다. 본질에 충실하면 됩니다. 굳이 옆을 의식하고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설교에 집중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 주셨고, 바르게 적용해 주셨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나 파급 효과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본질에 충실하면 됩니다. 치료가 필요하고 긍휼이 필요한 약자들을 살피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경쟁심을 경고하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요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남을 섬기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특히 예수님은 대결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당함 속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늘 군대를 부른다면 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쉽사리 대결에 빠져들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본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주의 QT 말씀 중에, 마가복음 10장 31절이 나왔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들이 많을 것이라“는 구절인데요.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는, 시간 차이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첫째와 꼴찌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세상과 다른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생활 전 영역에서 경쟁을 배척하고, 경쟁을 금지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경쟁의 자리를 포기하고, 콩쿠르에도 안 나가고, 시험을 거부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율법적인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삶에서 건져 올린 바, 비경쟁의 정신과 이념이 숭고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을 마음에 심어두자는 것입니다. 남을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동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본질에 충실하고, 결과는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때로는 양보도 가능합니다. 한번 경쟁에 이긴다고 인생이 확 바뀌는 것 아니고, 경쟁에서 진다고 인생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인생을 바라보며, 뭐가 더 가치있고, 뭐가 더 의미있는지를 알아가고, 바로 그것이 내 인생의 신앙원칙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경쟁을 통해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경쟁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교회의 속성입니다. 교회는 경쟁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경쟁에 몰입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 가치가 아니라, 세상적 가치를 교회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경쟁에 익숙해져있습니다. 교회의 생존 구조가 그렇기도 하지만, 정말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제가 5년간 부목사로 있던 지역에서 몇 개의 대형교회들이 이웃해 있었습니다. 하는 일은 다 비슷했습니다.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에 열성적인 방문 전도, 문서 선교, 병원 선교 등등… 어쩔 수 없이 교단이 나눠져 있다 해도, 한 지역 안에서 함께 논의하고 일을 나누어 할 수 있거나 협력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효율적이고 의미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잠재 교인을 두고 각각 전력 투구하는 것, 자신의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기 위한 동기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닙니다. 교회 간에 경쟁은 복음과 진리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아닙니다. 자신의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닙니다. 결국 그 사랑 때문에 이웃 교회가 경쟁 상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입니까? 적어도 교인 쟁탈전에서 어느 교회가 양보한다는 것을 보기는 정말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노버에서 두번째 교회로 출발했습니다. 우리에게 경쟁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동안 하노버에 한인교회가 단 하나여서 좋은 점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단점 또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똑 같은 교회로 하나 더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다른 것이 좋습니다. 다르다고 해서 우리 교회가 더 좋거나 우월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에 비해 더 부족하고, 더 모자라지만, 그래도 좀 다른 것을 지향한다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목회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교인들의 취향과 지향점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비록 아주 작게 시작한 우리 교회지만 세월이 지나고, 역사가 지나면서, 지역 복음화에 유익하였고, 결국 하나님께 덕이 되고 도움이 된 교회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갈망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의 출발은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보여주지 못한 것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잔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을 용기 있게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것을 교회가 따라하면 좋겠습니다. 경쟁하지 않고, 경쟁에서 벗어나서 거꾸로 양보하고, 희생하고, 말 없이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성도들도 행복해 한다면, 그게 가치있는 교회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에 교인들이 많지 않지만, 저는 어느 때보다도 감사할 것이 많고 참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맡겨진 교인을 넉넉히 사랑하고, 그 영혼을 책임질만큼의 교인이 있다면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교인의 숫자는 목회자의 역량과도 관계있지만, 많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함께 순수하고 간절하게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깊이 들어가서 하나씩 이루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목회자의 행복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훗날 언젠가 우리 교회도 좀 더 영글고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 앞에는 경쟁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더욱 성숙해지고 더 자라갈 수 있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경쟁 대신에 치열한 자기 성찰과 우직한 성실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경쟁에 휩싸여 있을 때는 아무래도 그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나의 맞은 편엔 싸워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을 볼 수 있고, 그들 배후에서 우리 모두를 보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상대는 외부의 경쟁자가 아니라 내 안의 나일지 모릅니다. 자꾸만 커지려고 하는 나, 언제나 이기려고 하는 나, 언제나 정당하려는 나. 이런 나를 위해 평생 살 것인가? 아니면 나 아닌 자들을 위해 살며, 하나님을 위해 평생 살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언제 성장하고 발전하고 자립하고 더 큰 일을 합니까? 그 답을 이렇게 드리겠습니다. 과연 지역 교회 간에 경쟁에서 이김으로 진정 이런 일이 이루어질까요? 외형적으로 더 커질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더 닮아가는 교회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본질에 충실하여 예수님을 닮아가는 행태를 가질 때, 하나님은 그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주시고, 일할 만한 환경과 열매까지 주실 줄 믿습니다. 열심히 전도하여 이웃 교회에 기꺼이 그 교인을 양보할 수 있다면 (교인을 양보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말이지만요), 교회도 교인도 새로운 복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본질에 성실하고 충실할 때, 비록 그 교회가 세상 이목에 돋보이는 교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되는 교회가 될 줄 확신합니다. 뒤늦게 출발한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를 지향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